[설날의 추억] 타짜-신의 손 며느리[설날의 추억] 타짜-신의 손 며느리

Posted at 2016.02.08 09:26 | Posted in 낙서장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아귀한테는 밑에서 한 장, 정마담도 밑에서 한 장, 나 한 장…. 아귀 한테는 다시 밑에서 한 장, 이제 정마담에게 마지막 한 장…." -영화 '타짜(2006)' 중에서-


무려 5일이나 되는 설연휴를 시작으로 2016년이 시작되었다. 인천공항을 이용하여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이용객이 무려 100만여 명이나 될 것으로 예상될 정도로, 요즘은 설연휴의 의미가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른바 '응답하라시대' 때만 해도 설연휴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나눠먹고 세뱃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민족대명절이었다. 또한, 1년 동안 묵혀 놓았던 때를 밀기 위하여 목욕탕으로 가족 나들이를 하는 날이었으며, 세배를 하기 위하여 1년중 유일하게 새옷을 선물받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은 설연휴를 그저 황금연휴쯤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하지만 '덕선이(혜리)'가 쌍문동에서 뛰어놀 때만 해도, 새옷 입고 새뱃돈 받고 맛있는 거를 실컷 먹을 수 있는 설날을 아이들은 생일보다 더 어린이날보다 더 크리스마스보다 더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상대적으로 설날에 모이는 사람의 수가 적었던 우리가족도 마찬가지였는데, 차례를 지내지 않는 대신 설날 아침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꼭 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만두빚기'였다. 어머니가 맥주병으로 밀어서 만든 만두피로, 우리형제들은 둥그렇게 모여앉아서 손가락에 연신 물을 묻혀가며 만두를 빚었다.  


오로지 자신이 빚은 만두만 먹을 수 있다는 규칙 때문에 우리형제는 매우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었다. 형제마다 구분을 짓기 위하여 만두모양을 다르게 했는데, 난 만두의 양쪽 귀를 붙여서 동그랗게 말았다. 자칫하면 옆구리가 터질 수 있기에 만두소의 양을 적절히 조절해야만 하는 고급기술에 속했다. 그해는 형의 결혼이 결정된 직후에 맞는 설연휴였다. 어머니는 형수도 우리가족이 되었으니 설날아침에 하는 만두빚기에 꼭 참석해야만 한다고 형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마도 어머니 딴에는 예비 며느리와 맥주병으로 만두소를 만들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수는 만두빚기가 다 끝나도록 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노여움이 더해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TV 드라마에서나 보던 고부갈등이 시작될까봐 불안했다. 만두빚기가 막 끝났을 무렵에 마침내 형수가 왔다. 눈치 빠른 형수는 사정 이야기를 하며 갖은 애교로 어머니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러나 형수한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좀처럼 노여움을 풀지 않았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대뜸 윳놀이를 제안했다. 어머니의 주도로 돈까지 걸린 윳놀이판이 시작되는 걸 보면서 난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어머니는 윳놀이에 있어서 '신의 손'이었다. 특별한 기술을 쓰는 것도 아닌데 타고난 손목스냅 덕분인지 던졌다 하면 윳이 나왔다. 무슨 짓을 해도 어머니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마음만 먹으면 윳이 10연속으로 나오는 것도 가능했기에! 그런 어머니가 돈이 걸린 윳놀이를 형수에게 제안한 게 무슨 의도인지 난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형과 편을 먹은 형수는 연전연패였다. 속수무책으로 형수의 지갑에서 만원짜리들이 빠져나와 어머니의 무릎 밑으로 들어갔다. 결국 형수의 지갑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장까지 털어낸 어머니가 판을 접으려 하자, 형수가 놀라운 제안을 해왔다. 



"어머니, 마지막으로 한 판만 더해요. 이번에도 제가 지면 저기 있는 만두로 저 혼자서 만두국 끓이고 설거지까지 다 해 놓을게요."(타짜버전: 야, 해머 갖고 와!)"

"얘는 저 많은 걸 너 혼자서 어떻게 한다고 그러니?"(타짜버전: 그렇게 피를 봐야겠어?)

"마지막으로 딱 한판만 해요? 네?"(타짜버전: 쫄리면 뒈지시던지?) 

   

형까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형수는 고집을 부려서 어머니와 1대 1로 윳놀이를 시작했다. 형수의 집에서는 '백도(혹은 바꾸도)'가 있다면서 매직으로 윳 하나에 검은 점을 그려놓은 채…. 예상대로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제대로 본떼를 보이겠다는 듯이 어머니는 형수가 말만 세우면 곧바로 잡아먹으며 형수의 전의를 꺾었다. 결국 어머니의 말 3개가 골인했을 동안에 형수의 모든 말들은 [도]에서 한발작도 나아가지 못한 채 옹기종기 모여있기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말마저 골인하기 직전에…. 난 봤다. 형이 어머니에게 일부러 말을 시켜서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을 말이다. 형의 작전은 성공했고, 어머니는 하나가 모자라 골인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형수가 마지막으로 던진 윳이 거짓말처럼 '백도'가 나오면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형수의 말들이 어머니의 말을 잡으면서 한꺼번에 골인해 버렸다. 모두의 입이 쩍 벌어진 순간이었다. 신나하며 하이파이프를 하는 형과 형수 사이로 보인 얼이 반쯤 나간 어머니의 얼굴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윳놀이의 '신의 손'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그후 형수는 어머니를 도와서 만두국을 끓였고 설거지까지 함께 했다. 어머니도 형수에게 딴 돈을 모두 돌려주었다. 기가막힌 순간에 나온 '백도' 한 방으로 어머니와 형수사이에 생겨날뻔 했던 고부갈등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수는 어머니보다 더한 신의 손이었다. 형이 형수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도, 회사 단합대회에서 형이 고스톱을 치다가 털린 돈을 형수가 도로 찾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우리가족은 설날에 윳놀이든 고스톱이든 하지 않았다. 신의 손이 두 명이나 있는 판에 끼어봤자 영혼까지 탈탈 털릴 게 뻔하기에! 만두빚기는 계속되었다. 만두가 흔해져서 더 이상 직접 만들어 먹을 필요가 없어진 이후에도 우리가족은 설날 아침이면 둥그렇게 모여앉아 각자 자신이 먹을(혹은 자신을 닮은) 만두를 빚었다. 그리고 그 만두를 넣은 떡국을 나눠먹어야만 비로소 한 살이 더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처럼 설날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보내는 특별한 시간이다. 그 시간들은 머지 않아서 사소한 사건마저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 그리고 진짜 부자는 소중한 추억이 많은 사람이다.   


새해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


  1. 에피소드가 재미 있네요 이번 설에도 만두 빚으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설연휴 때 윳놀이 못해서 아쉬웠는데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ㅎㅎ
  3. 저희 가족도 최근에 윷놀이를 했는데 신경전이 대단했지요
    불꽃이 튀겼습니다 ㅋㅋ
    재밌는 글 잘 보고 갑니다.
  4. 설날 추억 한 가득 안겨주셨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5. 설에 재밌는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다음 설에는 윷놀이를 챙겨가야겠어요^^
  6. 어머! 글을 너무 재밌게 읽고 나서..
    남자분이 참 재미지게 쓰신다 했는데..
    웅감님이셨네요.. 역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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