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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섹션: 개봉영화

88분-퍼즐 맞추기의 재미


88분(88 Minutes)
장르: 범죄/스릴러
감독: 존 에브넷
출연: 알 파치노, 알리시아 위트, 에이미 브랜너먼
러닝타임: 95분

진실, 그리고 정의... 그 둘은 어디서 교차할까?

스릴러 영화의 묘미는 퍼즐 맞추기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감독이 하나씩 하나씩 던져주는 퍼즐조각을 관객들이 나름대로 맞춰가며 영화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바로 스릴러라 할 수 있다.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한 괴담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한 소녀가 깊은밤에 홀로 자신의 방에서 퍼즐을 맞추고 있었는데, 계속 맞추다보니 어쩐지 퍼즐안의 그림들이 낯이 익었다. 뭔가 안좋은 예감이 들었지만 소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채 계속 퍼즐을 맞추어 마침내 그림을 완성했다. 완성된 그림을 본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그림은 방안에서 홀로 퍼즐을 맞추고 있는 소녀, 즉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소녀의 등뒤로 보이는 창문밖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소녀를 노리며 방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뒤를 돌아본 소녀는 창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검은 괴한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소녀가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검은 괴한이 소녀를 먼저 덮치고 말았다.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는 퍼즐 괴담같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진행에 따라 퍼즐을 맞추어간 관객은 수수께끼를 풀고 범인을 알아낸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퍼즐을 맞추는 방법에 따라 관객들이 도출한 수수께끼의 해답이 다양해지도록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이 맞추어졌을때 완성된 전체 그림을 통해서 기막힌 반전을 꾀하는 것이다. 즉 퍼즐을 맞추는 과정의 긴장, 마침내 퍼즐을 완성했을때의 성취감, 그리고 마지막 반전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그 영화는 스릴러로서 합격점이라 볼 수 있다.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배우인 '알 파치노'의 스릴러 영화 '88분'은 꽤 흥미로운 영화이다. 오랜만에 퍼즐 맞추기가 제대로 구현된 스릴러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영화 도입부에서 88분이라는 시간제한을 관객에게 제시함으로서 영화 전체에 긴장감과 속도감을 부여했다. 물론 테크노 리듬으로 광속편집을 보여주는 여타의 액션영화들에게 비한다면 이 영화의 긴장감과 속도감은 다소 루즈한감이 있지만, 이 영화는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는 액션영화가 아니라 관객들과 퍼즐 맞추기를 해야하기에 멀미가 날 정도의 속도감은 불필요하다.

영화는 지극히 흔한 이야기 구조로 시작된다. 기억의 공백, 카리스마 넘치는 범인, 정체성이 모호한 주인공, 의심스러운 주변인물들, 과거의 비밀, 숨겨진 진실 등등은 이미 수많은 스릴러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것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것들을 살짝살짝 비틀어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너무 자주보아 이제는 식상한 요소들을 제시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살짝 비틀어 관객의 퍼즐맞추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스릴러 영화에서 빠지지 않았던 로맨스 부분과 액션장면들을 과감히 덜어내고 영화를 오로지 알 파치노와 범인의 머리싸움으로 만듦으로서 관객들은 퍼즐맞추기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관객들은 누가 먼저 범인을 알아내는지를 놓고 알 파치노와 지적 대결을 벌이는 기분까지 느낄 수 있다.
 
물론 영화는 누구나 예상했던 결말을 보여주며 끝난다. 범인은 그동안 등장했던 주변 인물들중에서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면 금방 알 수 있는 인물이고, 그 배후 인물도 누구나 예상한대로 였다. 그러나 스릴러 영화는 논리적인 전개따위는 무시한 채 깜짝쑈를 통해 관객을 얼마나 놀래킬 수 있느냐가 중요한 공포 영화가 아니다. 함께 퍼즐을 풀어나간 관객들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결론을 제시해야만 하는 것이 스릴러 영화인 것이다. 스릴러 영화에서 감독이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반전을 주기 위해서 전개의 논리성은 무시한 채 깜짝쇼를 하면 영화가 일순간에 코미디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실패한 스릴러 영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깜짝쇼를 택하기 보다는 과감히 반전의 충격을 줄였다. 바로 그 부분때문에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잘 나가다가 뭔가 아쉽게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반전을 줄이는 대신 알 파치노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채워 넣었다. 마치 위기의 처한 체스판을 굽어보는 체스 마스터같은 연기를 보여준 알 파치노는 이 영화에서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그는 88분이라는 제한시간안에서 너무 초조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여유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머리속으로는 치열하게 생각하지만 행동은 신중하게 해내는 '정신 법의학' 전문가의 역할을 멋지게 해내었다.

영화 말미에 충격적인 반전이 없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아쉽지만 깜짝쇼보다는 이 영화의 결말은 전반에 걸쳐 빛난 알 파치노의 연기를 제대로 살리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기대에 약간 못미쳐 아쉽기는 하지만 시간을 투자하여 퍼즐맞추기를 해도 될만큼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이다.